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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판' - 무주셀렉트

길 위에서 미국의 풍경을 담아온 아메리칸 시네아스트

 

무주산골영화제는 2018년부터 5편 내외의 장편영화를 연출한 전 세계 영화감독 중 동시대 영화 미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감독이면서도 국내에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을 매년 1명씩 선정해 그의 주요 장편영화를 상영하고, 영화평론가의 전문 비평과 함께 집중 조명하는 감독 특집 프로그램 [무주 셀렉트 : 동시대 시네아스트]를 진행해왔다. 본 프로그램을 시작했던 2018년에는 칸영화제의 총애를 받아온 영국의 대표 여성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를 첫 번째 시네아스트로 선정했으며, 작년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네아스트 중 한 명이자 동시대 스웨덴의 가장 중요한 영화감독으로 평가받는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을 두 번째 시네아스트로 선정하여 그의 작품 세계를 소개했다. 2020년 올해 무주산골영화제가 선택한 세 번째 시네아스트는 미국 인디 영화의 여왕켈리 라이카트 감독이다.

 

국내에서 켈리 라인하르트, 켈리 리처드, 켈리 라이카트 등 비슷비슷한 몇 개의 이름으로 불려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1994년 장편데뷔작 초원의 강을 연출한 이후 작년에 첫 공개된 최신작 퍼스트 카우에 이르기까지 26년간 총 7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한 미국의 여성 감독이다. 그는 미국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존재감과 자기만의 단단한 영화 세계를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영화감독이자 길 위에서 건조하기 짝이 없는 미국의 풍경화를 스크린 위에 담아온 단 하나의 아메리칸 시네아스트다. 그는 그동안 어떤 타협 없이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고, 그의 영화들은 새로 공개될 때마다 해당연도의 베스트 영화리스트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며 전 세계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왔다.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채우고 있는 모든 영화가 이런 평가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국내 영화제에서 상영된 적은 있지만 정식으로 극장 개봉한 적은 없다. 2000년대 중후반 주로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올드 조이, 웬디와 루시, 믹의 지름길같은 영화들이 소개되었을 때 몇몇 눈 밝은 관객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잠시 회자되긴 했지만 일부 평론가와 마니아를 제외한 관객들에겐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그나마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로라 던, 미셸 윌리엄스가 출연했던 어떤 여자들IPTV를 통해 정식으로 공개되며 그 영화들이 잠시 이야기되었고, 최근에는 웬디와 루시가 수입되어 다운로드 서비스 중에 있지만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자신의 국제적인 명성에 비해 국내 관객들에겐 여전히 미지의 감독이나 다름없다.

 

그건 그의 영화가 그저 재미없고 어려워서라기 보다 영화의 호흡이 비교적 길고 느리기 때문에 극장의 큰 스크린이 아니고선 그의 영화가 가진 힘을 알아채기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거의 비주류 하층민이나 별 특징이 없는 중산층 인물들이고, 큰 사건이 발생하고 인물의 감정이 요동치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어떤 인물, 어떤 이야기를 다루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대상을 예쁘게 보여주는 법 없이 매우 건조한 시선으로 대상을 담는다. 그는 내 영화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냥 잠시 바라보는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어떤 영화보다 더 정치적이고, 예술적인 동시에 여성주의적이며 미니멀하다. 또한 바싹 마른 장작처럼 매우 건조한 느낌의 영화적 외피를 가지고 있지만 나의 영화들은 사회적 안전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다룬다는 감독의 말처럼 소외된 자들을 향하는 그의 영화적 시선은 언제나 사려 깊고 따뜻하다. 또한 그의 영화를 둘러싼 여러 가지 말과 글은 그의 영화를 자꾸 머리로 보게 하지만 사실 그의 모든 영화는 우리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고, 항상 예기치 않은 통찰을 선사한다.

 

이번 특별전에선 라이카트 월드의 시작이었던 장편데뷔작 초원의 강(1994)부터 13년 만에 완성한 두 번째 장편 올드 조이(2006), 영국의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웬디와 루시(2008), 그리고 여성주의 서부극 믹의 지름길(2010), 그의 영화 중 가장 예외적이라고 평가받는 어둠 속으로(2013), 건조하고 메마른 동시대 미국의 풍경화와도 같은 어떤 여자들(2016)에 이르기까지, 최신작 퍼스트 카우(2019)를 제외한 그의 모든 장편영화 6편을 상영한다. (최신작 퍼스트 카우를 상영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아마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면 한국의 어느 국제영화제를 통해 상영되리라 생각한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를 본다는 건 동시대 영화미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시네아스트의 영화를 볼 기회를 갖는 일일 뿐 아니라 이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소외된 자들로 가득한 세상을, 예상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리듬으로 감각할 수 있는 소중한 영화적 체험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남다은 평론가와 박인호 평론가의 애정과 통찰이 가득 담긴 영화비평과 함께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들을 다시 소개하는 이번 특별전은 길 위에서 미국의 풍경을 담아온 단 하나의 아메리칸 시네아스트, 켈리 라이카트의 세계를 살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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