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산골프로그래머가 관객 여러분께 보내는 다섯 번째 편지​

폴더를 뒤져보니 첫 기획서 파일 이름 밑에 2017년 12월 4일이라고 써있다. 17장짜리 PPT파일이 70분짜리 장편영화가 되는데 꼬박 2년 10개월이 걸렸다. 무주산골영화제와 관련된 일 중 아이디어가 실제 결과물로 나올 때까지 1~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 별로 없지만, 이번 [무주배경 장편영화 제작 프로젝트]는 유독 각별한 감정이 든다. 무주산골영화제가 영화제로서 자리 잡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면서 가장 해보고 싶었던 몇 가지 일 중 하나가 다시 한번 현실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공간, 두 명의 감독,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연결된 이야기. 각각 완결된 두 편의 단편영화인 동시에 한 편의 장편영화인 영화. 두 편의 영화 중 어느 것을 앞에 두어도 하나의 영화가 되는 영화. 충분하진 않지만 그렇게 모자라지도 않아서 만들면서 펀딩이나 관객 수에 대한 고민보다 영화적 고민을 우선할 수 있는 영화, 100% 무주 로케이션과 무주 주민 엑스트라 출연을 전제로 이런 이상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세상에 없던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독일의 대표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트, 도미닉 그라프, 크리스토프 호흐호히슬러가 참여한 <드라이레벤>(2011)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나의 공간, 같은 시간, 하나의 사건을 공유하는 삼부작 TV 미니시리즈면서 각각의 완결성을 3편의 장편영화다.

참여할 두 감독은 개성과 연출력을 모두 갖춘 감독이어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영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어야 했다. 많을 것 같은데 막상 찾아보면 이런 감독 찾기가 쉽지 않다. 간신히 기획개발비만 펀딩한 상태였지만 장건재 감독이 먼저 수락해 주었다. 뒤이어 김종관 감독이 함께 하기로 했다. 일순위로 생각했던 최고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두 감독도 내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이런 시간이 올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영화를 만들겠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던 나도 그땐 이렇게 흥미로운 장편영화가 나올 줄 몰랐으니까. 무엇보다 영화가 잘 완성된다고 해도 작은 영화제에서 기획한 영화가 큰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건 영화를 완성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

극장 개봉이 최종 목표였으므로 국내외 메이저 국제영화제 상영을 먼저 시도해보기로 했다. 첫 목표는 해외영화제 상영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발목을 잡았다. 계획을 바꿨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하기로 했다. 출품하는 날, 혹시 떨어지면 난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를 잠깐 상상했다. 며칠 뒤, 제8회 무주산골영화제 시즌 2 준비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 차를 타고 급하게 서울로 향하던 중이었다. 종로에 들어섰을 때 정한석 프로그래머에게 전화가 왔다. 올 것이 왔다. 발신자 이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영화 좋네요. 이번엔 영화로 부산에 한번 오시죠.” 전화를 끊고 나서야 주책없이 내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깨달았다. 오랫동안 출품된 영화를 보고 판단하는 일만 하다가 입장이 바뀌어보니 그동안 영화를 출품해 준 감독과 피디들에게 더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2년 10개월의 긴 여정의 첫 마침표가 이렇게 찍혔다. <달이 지는 밤>이 2020년 25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되었다.

<달이 지는 밤>을 이루는 두 개의 영화는 두 감독이 오랜 시간 쌓아온 각각의 세계의 연장선 상에 있지만 두 영화 모두 장르적 요소를 적극 활용하여 그동안의 영화와는 또 다른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이 두 영화는 같은 공간과 같은 주제를 공유하면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영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한 영화가 먼저 완성되었고, 한 감독은 그 영화를 보고 자신의 영화를 이어 만들었으므로 한 영화가 편지라면, 다른 영화는 답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김금순과 안소희, 강진아와 곽민규의 연기다. 이들의 훌륭한 연기 앙상블은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고, 영화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조금 더 말하고 싶기도 한데 영화가 공개되기 전이므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듯하다.

이제 감사 인사를 할 시간이다. 무엇보다 김종관, 장건재 감독에게 정말 고맙다. 긴 시간을 기다려주었고 함께 해주었다. 충분하지 않은 여건이었겠지만 자신의 영화만큼 영화 전체를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최상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노력해 주었다. 두 감독이 있어 의지할 수 있었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특히 추석 연휴에도 두 영화를 하나로 만드는 후반작업 과정을 주도해 준 장건재 감독, 윤희영 피디, 김우리 피디께 감사하다.  그리고 무주산골영화제의 서류와 말을 믿고 이런 쉽지 않은 영화의 제작을 지원해 준 무주군수 이하 무주군의 모든 관계자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그 긴 시간을 거쳐 관객과 만날 수 있었던 건 이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프로듀서 역할을 하며 전체 펀딩과 예산을 총괄했던 신동환 사무국장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고맙다는 말조차 꺼내기 쑥스러운 오랜 동료지만 많은 분들이 그의 능력과 노력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코로나19가 영화산업 전체를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다.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들이 닥쳐오고 있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화제 역시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어떤 변화가 와도 영화제는, 수익을 목표로 하는 영화산업이 하는 일과는 다른 일, 그들이 할 수 없는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영화제의 존재 가치는 그런 노력들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무주산골영화제가 「무주에 어디 볼 데가 있습니까?」(글. 정원선) 같은 무주에 관한 책을 출판하고, 관객과 함께 <순간>(감독. 윤재호)같은 단편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백은하 배우연구소와 함께 <넥스트 액터> 같은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배우에 관한 전시와 함께 전문책자를 출판하고, 무주산골영화제 사용설명서와 IF시리즈 같은 무주를 담은 영상콘텐츠를 제작하는 건 바로 영화제에 대한 나와 동료들의 이런 믿음 때문이다. <달이 지는 밤>도 이런 믿음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0월 21일 수요일, 오늘 오후 7시 30분, 부산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달이 지는 밤>이 관객과 첫 만남을 갖는다. 매년 상당한 수의 영화를 보는 내 눈에 <달이 지는 밤>은 꽤 괜찮은 영화다. 하지만 일반관객들과 영화관계자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봐줄지 모르겠다.  궁금하고, 불안하고, 기대된다. 부디 그들에게도, 무주산골영화제를 사랑하는 관객 여러분께도 이 영화가 괜찮고 멋진 영화면 정말 좋겠다. 며칠 전엔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감사하게도 올해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 부문에 초대받았다. 내년엔 극장 개봉을 하려고 한다. 물론, 무주산골영화제가 만든 영화니 내년 무주산골영화제에서도 상영한다.

영화는 각자 자기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지만 종종 관객들이 영화의 운명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갈 길이 머니, 영화가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부디 여러분들이 <달이 지는 밤>을 기억해 주고, 관심 가져주고, 좋아해 주면 좋겠다. 많은 분들의 호응이 있다면 무주산골영화제는 다른 두 명의 감독들과 두 번째 프로젝트를 시작할 힘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