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민 감독의 장편데뷔작 <은빛살구>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청약에 당첨된 작은 새 아파트의 보증금 1천만 원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정서는 낮에는 작은 회사의 디자이너로 밤에는 웹툰 작가로 일한다. 그는 비정규직 인생에 빛이 되어줄 아파트를 내 것으로 만들고,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1천만 원이 꼭 필요하다. 굳이 휴가를 내고 멀리 강원도까지 가서, 엄마와 헤어지고 새 가정을 꾸린 아빠 집에 잠시 머무르기로 한 건 그 돈이 꼭 필요해서다. 하지만 능구렁이 아빠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 영화에서 아빠는 이 서사에 긴장을 불어넣는 갈등의 핵이다. 아빠는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믿는 아버지 세대의 상징이다. 그는 평생 한 방의 성공을 원했고, 지금은 자신이 짓고 있는 건물이 엄청난 부로 돌아올 거라 철썩 같이 믿고 있다. 그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돈이 더 필요하다. 각자의 성공과 미래를 위해 서로의 돈이 필요한 딸과 아빠는 대립하고 갈등한다. 아빠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눈치 없는 애인은 대를 이은 아빠의 또 다른 얼굴이다. 정서가 그리는 웹툰의 주인공은 뱀파이어다. 뱀파이어는 남의 피를 빨아먹어야 살 수 있고, 흡혈을 당하는 희생자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영화는 이 뱀파이어와 희생자로 가득한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여러 장르적 관습을 활용한 가족 소동극에 효과적으로 응축시킨다. 뱀파이어와 희생자로서의 삶 모두를 당당하게 거부한 정서의 선택이 진짜 자유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