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토크] 순응자
순응자 The Conformist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Bernardo Bertolucci이탈리아, 프랑스, 독일│1970│111분│극영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마르첼로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자 중산층 집안의 줄리아와 결혼하고, 대중의 지지를 받는 무솔리니 정권의 비밀경찰에 자원하지만 첫 번째 임무와 자신의 마음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1970년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29세에 연출한 세계영화사 최고의 걸작 중 한 편으로 한국에서는 46년 만에 극장 개봉했다. 프란시스코 포드 코폴라, 코엔 형제, 박찬욱 등 국내외 수많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고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베르톨루치 감독이 세계적인 촬영감독 비토리오 스트라로와 함께 창조한 매혹적인 스타일과 영화 미학은 광고, 패션, 드라마, 디자인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제4회 무주산골영화제 2016. 06. 04. 토요일 산골영화관진행 : 정한석 영화평론가정한석) 안녕하십니까. ‘영화산책’ 정한석입니다. 영화 흥미롭게 보셨나요? 저도 되게 오랜만에 보게 됐는데요. 재미있네요. (관객 : 어려워요) 저도 어렵습니다. (웃음) 그래서 쉬운 얘기를 좀 해볼까 하고요.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름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라는 사람입니다. 이탈리아 사람이고요. 1940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일흔이 넘었죠? 아마, 베르톨루치 감독은 대대로 예술가 집안인 환경에서 자란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그 당대에 굉장히 유명한 시인이었다는데요. 그래서 이 베르톨루치 감독도 10대 때부터 시를 썼고, 감독을 하기 전에는 비범한 10대 시인이라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시인이 아닌, 감독이 된 셈인데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운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감독이 되었다고 해요. 시인이자, 평론가, 그리고 영화감독이었던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라는 이탈리아 감독을 만난 것입니다. 파솔리니 감독은 베르톨루치 감독 아버지의 친구였습니다. 그가 집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찾아오면서 베르톨루치 감독과도 자연스럽게 교분을 쌓게 되었고, 그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베르톨루치 또한 ‘나도 감독을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파솔리니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의 조감독으로 베르톨루치의 영화 인생이 시작됩니다. 시인들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두 사람 모두 막무가내일 정도로 무모하면서 또 용감했던 모양입니다. 장편영화 현장에서 베르톨루치가 ‘파솔리니’에게 ‘사실은 장편영화 경험은 처음입니다.’라고 그랬더니 이 감독이 하는 말이 ‘괜찮아, 나도 처음이야.’ 그러더래요. (웃음) 이런 두 사람이 모였으니까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다? 영화를 보셨다면 이 감독의 기질이랄까요? 이런 걸 충분히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내에서‘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유명한 영화는 <마지막 황제>(1987) 일 겁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인데요. 영화사상 처음으로 서유럽인이 서유럽적인 시야에서 중국인의 드라마를 그렸습니다. 대중적인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이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72년이던가요. 이때 만들어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라는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를 많이 보신 분들은 잘 아실 텐데요. 이 영화가 70년대 초에 일으킨 일단의 성적 물의라고 할까요? 그 반향이 컸습니다. 감독으로서는 창의적 표현이자 시도였을 텐데요. 바로 이 ‘창의적인 성적 물의’로 인해 감독이 실제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2개월간 투옥당하기도 했고요. 5년간 투표권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창의성을 발휘해서 도발적인 한 편의 영화를 만든 이후에 치러야 할 대가가 꽤 높았던 시대를 거친 감독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신 <순응자 The Conformist>(1970)는 베르톨루치 감독의 초기작에 속합니다. 1970년에 제작되었는데요. 같은 해에 이 작품과 더불어 한 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습니다. <거미의 계략>(1970)이라는 영화입니다. 이탈리아의 1930년대 파시즘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었고,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서의 단편소설 「배신자와 영웅에 대한 테마」를 각색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당시 감독 스스로 어떤 변화를 모색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동양의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거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만든다거나 했던 것이 그렇습니다. 감독이 그 동안 받았던 영화사적 영향이라든지, 이로부터 탈피하고자 했던 창작자로서의 욕망이 <순응자> 안에 이런저런 요소들로 엮여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간단하게 느낌을 요약하자면, 굉장히 시적이고 한편으로는 환상적이고, 또 정치적인 면에서도 매우 상징적인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먼저 말씀을 드리자면, <순응자>는 동명의 원작을 각색하여 만든 작품입니다.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 알베르토 모라비아라는 작가의 소설이 그것인데요. 영화의 기초부터 탄탄했던 셈이지요. 더불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주인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르첼로 역을 맡은 장-루이 트린티냥이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몇 년 전에 그가 나온 영화를 보셨을 거예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2012)라는 영화에서입니다. 여기에서 아내를 잃고 정신적으로 미쳐가고 있는 노년의 남자를 연기했습니다. <순응자>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고 바로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거예요. 많은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유명한 프랑스 배우입니다. 토요명화 같은 프로그램을 챙겨서 보신 분들이라면 잘 아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끌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1966)와 에릭 로메르 감독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에도 출연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영화 음악을 들여다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에 삽입된 음악들이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조르쥬 들르뤼라는 음악 감독이 영화에 참여했는데요. 별명이 영화계의 모차르트라고 하더라고요. 즉흥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색조의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영화 음악 감독이었던 모양입니다. 영화를 보고 또 듣고 있으면 그의 별명처럼 뭔가 다변화되어 있는 인상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특히 베르톨루치 감독이 존경했던, 선배 세대인 프랑스의 누벨바그 세대 거장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며 영화계의 모차르트라고 불릴 정도로 칭송받았으니 그 입지를 확인할 수 있겠죠. 또 한 명,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비토리오 스토라로라는 당대에 무척 유명했던 촬영감독인데요. 촬영감독의 이름, 명성에 연연하지 않더라도 영화에서 느꼈던 감정을 되돌아보면, 화면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있으셨을 겁니다. 빛의 활용이라든지, 어둠의 활용이 아주 우아합니다. 이 우아한 색조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죠. 그리고, 영화가 상당히 양식적입니다. 말하자면, 실내외 세트나 구조가 그 공간을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조명을 사용하는 데 있어 달인의 경지를 보여주는데요. 인공조명의 활용이나 자연 빛의 활용에 탁월하여 당시 많은 감독과 관객들을 매혹했던 촬영감독입니다. 물론 지금은 워낙 장비와 기술이 좋아졌고, 고품질의 영상을 익숙하게 소비하고 있어서 큰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영화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마 영화를 다르게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카메라 앵글 또한 그렇습니다. 아주 혁신적인 앵글들이 구현되었는데요. 이를테면, 영화의 후반부에 콰드리 교수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시면, 나무가 빽빽한 숲속 저 끝에서 빛이 한줄기 퍼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 빛을 주변으로 인물들이 퍼져있고, 범상치 않은 사내들이 어느 순간 빛을 뚫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콰드리 교수를 살해하죠. 이 과정을 빛과 어둠을 활용하여 담아 냅니다. 살해 씬임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의 만들어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가 제가 알고 있는 <순응자>를 만든 이들에 대한 정보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영화를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영화가 무척 산만합니다. 그런데 또 산만함이 가진 미학이 있습니다. 산만함도 미학이 될 수 있다면, 임의로 ‘산만함의 미학’이라고 불러보겠습니다. 산만함의 미학을 갖추고 있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계열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7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했던 로버트 알트만’라는 감독의 영화가 그렇습니다. 그의 영화를 보면, ‘아, 이 사람의 영화도 ‘베르톨루치’ 영화만큼 산만하구나.’라는 느낌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또 한 명이 있는데, ‘르톨루치’감독이 영화적 영향을 받았고, 많은 유럽권 젊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누벨바그 운동 시대의 거장 장 뤽 고다르 감독입니다. 이 감독의 영화 또한 무척 산만합니다. 베르톨루치 감독이 그의 초기작을 굉장히 존경하는데요. 우리가 역사를 다룰 때, 서구에서는 예수의 탄생 이전과 이후를 기준으로 기원 전, 후라고 부른다면, ‘르톨루치’감독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에게 영화사라는 것은 ‘ 뤽 고다르’ 이전과 장 뤽 고다르의 이후만 있을 뿐이다.’라고요. 이 정도로 그의 작품에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던 거죠.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에도 이 산만함의 미학이 깊이 내재해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베르톨루치 감독은 고다르의 영화적 영향력에서 탈피하기 위해 몸부림치기도 했는데요. 이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일화가 한가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순응자>가 초연을 할 때, 비교적 신인 감독이었던 그가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고다’ 감독을 초청했던 것입니다. 시사회장에 그가 왔고, 영화를 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프랑스의 어떤 구역에서 만나기로 하죠. 신인 감독 베르톨루치는 기대했습니다. 자신보다 10년이나 연배가 높고 또 거장의 반열에 든 고다르 감독이 어떤 아름다운 충고를 해줄 것인지에 대해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 사람은 동네 길가에서 만나게 됩니다. 고다르 감독은 그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쪽지 하나를 건네주죠. 쪽지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라.’라고요. 말하자면, 고다르 감독은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겁니다. 선배 감독이 보기에 이 영화는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 싸운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죠. 베르톨루치 감독은 쪽지를 읽고는 바닥에 집어 던집니다. 그리고 발로 짓이겨버리죠. 이때부터 고다르 감독과 베르톨루치 감독 사이에 영화사적, 영화세대론적 구분의 지점이 생겨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 두 감독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죠. 시대를 생각해보면 조금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70년대 유럽은 굉장한 격변기였습니다. 그 시대에 베르톨루치 존경했던 고다르라는 인물은 투사, 혁명가에 가까웠습니다. 혼자 모든 자본에 맞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 그가 보기에 이 영화는 너무 비싸고, 황홀하고, 외형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죠. 그렇지 않았다면, 베르톨루치 감독에게 질책과 훈계의 문장이 적힌 쪽지를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베르톨루치 감독은 ‘관객과 만남을 추구하는 첫 번째 영화’로 <순응자>를 꼽습니다. 감독 본인에게 이 영화가 갖는 의미가 그만큼 큰 것이겠죠. 또 다른 한편으로, 베르톨루치 감독은 <순응자>를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누군가 ‘이 영화는 어떤 영화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그때마다 그는 ‘나로서는 아버지를 죽이는 영화입니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의미를 몇 가지로 상정해볼 수 있겠는데요. 첫 번째, 영화 속에서 실제로 자신의 의존적 아버지인 콰드리 교수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다르라고 하는 자기의 영화사적 아버지를 자신으로부터 죽이는 하나의 상징이자 과정으로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두 번째, 1930년대 베르톨루치 감독의 실제 아버지의 젊은 시대의 한 면모, 역사의 한 얼룩을 죽인다는 의미에서 ‘아버지를 죽인 영화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해석해봅니다. 이전으로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영화가 산만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왜 이 영화가 산만한지 가정을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산만하다’라는 말을 어떨 때 쓰나요? 앞뒤가 없거나, 맞지 않을 때 산만하다는 말을 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없으면 산만하다고 느끼는 것이죠. <순응자>는 사실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처음-중간-끝만 있는 영화죠. 고다르 감독의 일화를 또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가 했던 이야기가 <순응자>와 잘 맞아떨어지거든요. 고다르 감독이 앞뒤가 없는 영화를 워낙 잘 만들다 보니, 앞뒤가 있는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들이 궁금했나 봅니다. 고다르 감독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해요. ‘당신은 영화가 혹은 예술이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는 형식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부정하는 것입니까?’라고요. 고다르는 대답합니다. ‘아니요,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순서의 필요가 없는 것이죠.’라고요. 어떤 영화는 우리가 끝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중간으로 갔다가 또 앞으로 가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영화는 중간에서 마치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가 끝인 것 같다가도 앞으로 돌아가는 영화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산만함의 미학과 같은 맥락이죠. 이 방식이 영화 <순응자>에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산만함의 미학이 적용됐는지 살펴보면, 첫 번째로 기승전결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감독의 표현 기복이 심하다는 점입니다. 이 인물이 아까 저 인물이었나 싶을 정도로 캐릭터의 질감이나 톤이 한 영화 안에서도 매우 다르게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주인공 마르첼로의 아내가 초반부와 중반부까지 나왔던 모습과 후반부에 등장하는 모습이 무척 다릅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온도 차를 생각해보시면 금방 이해하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지점인데요. 이 영화는 시간상으로 앞뒤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선형적’이라는 말이 하나의 선을 따라서 가는 것이라고 해석했을 때, 시간을 선형적으로 보자면, 이는 시간에 기승전결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시간의 선형성이 없어서, 시간의 기승전결이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비선형적으로 묶여 앞뒤가 꼬여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도약과 생략이 심하게 구현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유를 살펴보면, 영화 안에 회상 구조가 많기 때문입니다. 마르첼로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많이 삽입되어 있는데요. 영화에서는 이를 플래시백이라고 합니다. <순응자>에 플래시백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주인공이 지난 과거를 회상하는 정신의 상태가 바로 이 영화의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인물의 정신 상태를 형식화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쓸 수밖에 없었던 기법인 거죠. 플래시백이 플래시백으로 들어가고, 또 플래시백이 플래시백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거듭될수록 우리가 갖는 시간의 선에서 오는 압박이나 제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이 영화를 이용하게 되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주인공의 무의식 흐름 같은 것, 기억 같은 것이 이 영화의 전반적 기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억’이라는 것이 언제나 순리적이거나 순서적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무언가 기억할 때, 갑자기 떠오르거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것이 기억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기억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무의지적, 비자발적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기도 하더랍니다. 유럽 문화권 안에서 이런 비자발적이고 무의지적인 의식을 담은 문학적 지점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마르셀 프루스트 작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야기합니다. <순응자>는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작품의 의식의 흐름과 비자발적이고 무의지적인 기억의 흐름을 영화로 어떻게 형식화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만든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 영화인가.’라고요. 영화 초반부에 마르첼로가 자동차에 타면서 회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죠. 후반부에 이르러 다시 처음의 자동차 장면이 나오고 회상이 끝나면서 영화는 형식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감독은 이 영화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기억 속을 여행하는 영화다.’라고 말이죠. 여기에서 ‘여행’이라는 표현은 무의지적이고 비자발적으로 생겨나는 주인공의 생각과 기억을 따라 영화가 흘러가다 맺음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에 호의를 가지고, 조금 더 수사학적 표현을 덧붙여 말하면, <순응자>는 기억을 여행하는 시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영화가 민감한 시대를 배경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에 영화가 발휘하는 정치적 의제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객과 평론가들도 있을 겁니다. 감독 자신은 ‘기억 속을 여행하는 영화’라고 창작자답게 말했지만 말입니다. 저 같은 평론가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기억을 정치화하는 영화다.’라고요. 이 문장을 가지고 또 이야기를 심화해보겠습니다. 기억을 정치화한다고 했을 때, 이 영화가 어떤 시대를 기억하길래 이 기억을 정치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인데요. 여기에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해되지 않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계속해서 나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뜻을 내비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정상이고, 평범한 것인지 쉽게 예단하기는 어렵죠. 주인공이 사는 배경인 1930년대는 예컨대, 동성애를 가진 사람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결되는 시대였습니다. 혹은 파시즘에 동조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주류에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시대, 다시 말해, 주류에 속해야만 평범한 사람이 되는 시대였다는 것이죠. 감독은 이런 시대를 상상하면서 기억의 정치화를 통해 비정상적인 시대에 정상이란 무엇인가, 진정 평범한 것이란 무엇인가를 주인공의 입을 빌려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주인공이 얼마나 비정상적인가가 이 영화의 핵심 질문이 되겠죠. 그렇다면 감독은 왜 정상이라는 오명 혹은 평범함의 압박, 주류에 대한 열망 그리고 결국에는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책임 같은 것을 풍자적으로 묻고 있는 걸까요? 예를 들어, 결말을 보면, 끝내 파시즘에 동조해야만 정상인이고 평범한 사람이 된다고 믿었던 주인공이, 파시즘의 시대가 끝나고 나서는 곧바로 이 이념을 배신해야만 정상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급변의 태도를 보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기억의 정치화, 정치적 무의식 테마와 관련된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가 대중에게 선을 보이고 시간이 많이 지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감독에 따라 ‘이 영화는 무슨 영화입니까?’라는 질문에 매번 같은 답을 하기도, 다른 답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베르톨루치 감독은 후자에 속했죠. 이번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영화는 사실 현재에 대한 영화다.’라고요. 즉, 1970년에 대한 영화라는 겁니다. 조금 더 확장하면 1970년대 유럽에 대한 영화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1970년대에도 파시즘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베르톨루치 감독이 생각하기에,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첼로라는 인물처럼 1930년대에 성행했던 파시즘을 향한 대한 동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영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버린 과거로부터 기억을 끌어올려서 현재 가지고 있는 자기 생각, 느껴지는 위험한 징조, 기억의 정치화를 영화에 나타내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죠. 여러 가지 측면을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베르톨루치 감독의 <순응자>는 형식적으로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지점과 기억의 정치화를 끌고 가는 의식적인 지점 모두를 가진 영화이지 않나 싶습니다.이 밖에, 영화가 가진 또 다른 면모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앞서 이 영화의 형식과 정치사적, 사회적 구조와 영향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해석한 <순응자>와 다르게 이 영화를 받아들인 무리가 있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 <순응자>에 대해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아메리칸 뉴 시네마(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미국영화 중 기성세대로부터의 단절이나 미국 사회의 부정적 현실에 관한 문제들을 주로 다루었던 영화)라는 경향이 생겨납니다. 이때 우리가 잘 아는 일군의 감독들이 떠오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콜세지, <대부>(1972)를 만든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같은 감독들이 아메리칸 뉴 시네마 일군의 무리였습니다. 유독 이 세 사람이 지금 여러분들께서 보신 <순응자>라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실은 배급이 잘 안 됐을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파라마운트사(파라마운트 픽쳐스)라는 거대 자본영화사와 손을 잡고 제작을 하게 되죠. 이 배급사에 선을 닿게 해준 사람이 바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입니다. 그가 했던 말 중 하나가 있는데요. ‘나에게 있어 첫 번째, 모던한 영화적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순응자>를 본 것이다.’라고요. ‘모던하다’는 것은 현대적이라는 것을 뜻하겠죠. 이 말은 <순응자>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에게 있어 어떤 새로운 경험으로 작용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뿐만 아니라 코폴라 감독은 <순응자>를 만든 스텝 중 가장 중요한 스텝과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의 촬영을 맡은 이가 초반에 말씀드렸던 비토리오 스토라로였거든요. 그렇게 코폴라 감독은, 자신이 존경했던 베르톨루치 영화의 촬영감독과 함께 일해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 같은 경우에는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1976)를 보면 <순응자>에 대한 애정이 드러납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1인칭 내레이션을 계속하는데요. 이 내레이션에 대한 영감을 <순응자>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다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 개봉했던 <헤일, 시저!>(2016)의 감독인 코엔 형제는 신작을 만들기 전에 항상 스텝들을 모아서 <순응자>를 보고 작업을 시작한다고 하더라고요. 자신들이 만들고자 하는 궁극의 영화는 바로 이런 것이니까 다 함께 잘해보자는 뜻인 것 같은데요. 정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웃음) 이 정도로 <순응자>라는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 수 있겠습니다. 국내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꼽을 수 있을 텐데요.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영화적으로 가장 완벽한 영화 중 한 편이다.’라고 말이죠.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콰드리 교수가 살해 당하는 장면을 보면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 후반부 살해 장면이 떠오릅니다. <순응자>에서 영향을 받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요. 말씀드렸던 것처럼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면서 산골 토크의 끝을 맺겠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끝납니다. 마르첼로가 뒤돌아 있다가 화면에 시선을 던지고, 관객을 응시하면서 말이죠.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한국 영화 중에 이런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주 유명한 감독입니다. (관객: 봉준호) 맞습니다. 이렇게 빨리 맞추실 줄이야. (웃음) <살인의 추억>(2003)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안에서 살아야 할 주인공이 갑자기 시선을 돌려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볼 때는, 그가 우리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일 겁니다. 그 응시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싶다는 의도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마지막에 주인공이 카메라를 응시할 때 저는 ‘살인자, 너 거기 있지.’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사가 아닌 시선으로 스크린 바깥에 질문을 던지거나 의사를 표출하는 것이죠. <순응자>의 경우에는 마르첼로의 시선을 통해 관객에게 ‘당신은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고, 시대로부터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영화로부터는 어떤 경험을 하였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인공의 환상, 그의 기억, 행적들을 함께 따라가다가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을 때 그렇게 묻는 것 같더라고요. 자, 영화가 질문했으니까 ‘마르첼로’의 눈빛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그 답을 생각해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나중에 종종 <순응자>가 생각나신다면, 영화 양식과 테마, 그리고 여러분이 경험하신 영화적 체험을 이 마지막 장면과 함께 떠올리면서 흥미로운 영화의 기억으로 남기시길 바랍니다.
